안천식 변호사의 '찢어진 예금통장' 그리고 망가진 사법부



  • 안천식 변호사는 자신이 변호를 담당했던 H건설사와의 소송사건에 대해 세 권의 책을 펴냈다. H건설사와의 소송에서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18번 패소한 소송기록이 주된 내용이다. 첫 권은 2013년 1월 발행된 ‘18번째 소송’이란 제목의 책이며, 2016년 6월 2일자로 발행된 ‘고백 그리고 고발’은 ‘소송’의 수정본이다. 그리고 2018년 3월 1일자로 발행된 ‘찢어진 예금통장’은 ‘18번째 소송’의 축약본이다. 시차를 두고 발행된 세 권의 책은 별개의 사건을 다룬 것이 아니고 H건설사와의 소송만을 다루고 있다. 수정본인 ‘고백 그리고 고발’은 사실관계, 증거, 판결문 등을 삽입해 책 불량이 404쪽에 이르며, 축약본인 ‘찢어진 예금통장’은 수정본과 동일한 내용에 증거와 판결문 등을 빼 232쪽으로 간결하게 재편집된 것이다.

    안 씨의 책은 법학도가 이해하기에도 조금 난해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적 사실관계와 안 씨의 주장, 그리고 안 씨가 주장하는 법리가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안 씨의 주장을 뒷받침 할 만 한 자료들이 첨부되어 있어 독서를 어렵게 하고 있다. 보완 요약본이 발행되었다고는 하나 이 책 하나만으로는 사건의 얼개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문제는 또 있다. 상징적 문장으로 이루어진 소타이틀은 주제를 명료하게 드러내지 않아 직관성에 익숙한 독자를 곤혹스럽게 한다.

    그렇지만 안 씨의 생각과 주장은 이 책 겉표지와 내용에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그것은 ‘법원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법 앞에 평등한가?“, ”법관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필자는 우리나라 법체계에 대한 거대 담론보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문장 곳곳에 쏟아내는 격정적인 반응들은 냉정을 유지하고 책에 몰입하려는 독자들의 독서를 방해하는 아쉬운 대목이다. 물론 그것은 필자가 소송 중 경험한 황당함과 분노의 다른 표현일 수 있겠다.

    해당 사건은 1997년 9월 시작되었다. 김포시 고촌면에 살던 기노걸 씨는 자신이 소유한 1,000여 평의 토지와 건물(이하 부동산)을 19억 6,000만 원에 매매하기로 D건설사와 계약하고 매매대금의 절반인 9억 8,300만 원을 계약금과 중도금 명목으로 받았다. 이후 IMF사태로 D건설을 부도가 났으며, 기노걸 씨가 2004년 노환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아들 기을호 씨가 토지만을 상속받게 된다. 이듬해 H건설사는 1999년 11월 24일자로 작성된 새로운 계약서-기노걸이 1997년 9월경에 D건설과 체결한 부동산 매매계약을 H건설이 1999.11월 5일 승계 인수함에 따라 이를 재확인하고, 기 수수대금의 승계 및 잔대금 지불 방법을 정한다-를 근거로 기을호를 상대로 부동산 소유권이전등기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H건설사가 재판부에 제출한 계약서가 의혹 투성이었다. 그즈음 기노걸이 작성은 계약서는 한글과 한문이 병기된 기노걸 자필과 한문으로 된 인감이 찍혔는데, 유독 H건설사가 제출한 계약서는 타인의 필체에 막도장이 찍혔다. 그리고 기노걸이 중도금을 받고 찢어버린 통장의 계좌번호가 기입되어 있었다. 이것이 이 사건의 시작이다.

    안천식 변호사는 재판 내내 계약서가 가짜라는 사실을 밝히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원고 측 증인 2명을 위증죄로 형사처벌 받게 하는 결과도 얻어냈다. 그러나 신뢰할 수 없는 증인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기을호 사건의 민사재판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재판부는 피고 기을호나 그의 변호인 안 씨가 납득하기 어려운 원고측의 주장만을 수용한 판결을 반복했다. 그 결과 안 씨는 H건설사와의 재판에서 모두 패소했다. 그래서 피고 기을호 씨는 자신이 당연히 받아야 할 잔금도 다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재판 결과를 수용하기 어려웠던 안 씨는 증거를 보강하여 여러 번 재심을 신청했다. 그러나 번번이 기각 당했다. 안 씨는 올해 초 위증혐의로 처벌받은 A씨가 기노걸 씨의 계약서를 작성했다는 증거를 찾아내어 현재 재심을 진행하고 있다. 재심 결과는 15일 선고될 예정이다.

    사실, 안천식 변호사의 경험이 모두에게 해당되고, 또 그의 주장이 모두 옳다고 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법조계에서 근무하는 많은 이들이 안 씨의 주장에 공감을 보내는 것을 보면 그의 주장이 결코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안 씨의 주장은 우리나라 법체계에 대한 의심과 질문을 이끌어 내고 있다. 그것은 ‘법원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법 앞에 평등한가?“, ”법관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라는 회의이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은 안 씨 같은 변호사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있다. 그 결과 석궁테러가 발생했고, 대법원장 차에 화염병을 던지는 일도 일어났다. 법조계에서 30년 넘게 몸담아 온 모 변호사는 “판사들이 개판으로 재판을 하는 것은 총에 맞아 죽을 일이 없기 때문‘이라는 독설도 날렸다. 이처럼 각계각층에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져 있는 것이다.

    사법부가 국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서도 검찰과 함께 견제 받지 않는 권력으로서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전횡을 일삼을 수 있는 이유는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국민에 의한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국민들과 법조계 일각의 판단이다. 그래서 일각에서 검찰과 판사를 견제할 수 있는 배심제도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국민이 직접 기소할 수 있는 대배심제도과 공판에 참여할 수 있는 소배심제도이다.

    안천식 변호사의 H건설사 관련 재심은 익일인 15일 재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선고 결과에 따라 안 씨가 18번 패소의 전설을 이어갈지 아니면 모든 역경을 딛고 승소한 변호사가 될지 결정된다. 현재로서 선고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예단할 수 없다. 그렇지만 선고 결과에 따라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 회복될지 아니면 불신의 골이 깊어질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 관리자 news@jeo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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