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 최경환

  • 김 대통령은 마음속에 있는 천사와 악마 중에 천사의 말을 듣고 순종하고 그런 방향으로 노력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누구든지 마음속에 천사가 있기 때문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고 있지만, ‘위험하니까 못하겠다. 손해보니까 못하겠다’ 이런 생각을 갖기 때문에 양심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행동하는 양심’은 내 마음속에 있는 악마의 말을 멀리하고 천사의 말을 순종하는 삶을 말한다. (최경환, 『김대중 리더쉽』)


    속 깊은 형에 대한 존경과 감사


    최경환은 자신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쌍둥이 형을 말한다. 쌍둥이 형은 최경환보다 5분 먼저 세상의 빛을 봤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형이 지금까지 집안의 가장 노릇을 도맡아서 하고 있다. 집안의 대소사는 물론이고 최경환의 뒷바라지 까지. 최경환이 학생운동을 할 때도, 민주화운동으로 음습하고 질곡의 삶을 살아야 했을 때도 형은 언제나 최경환의 든든한 후원자였고 멘토였다. 이런 형에 대한 최경환의 감사와 존경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전환점 ‘5.18광주민주화운동’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없었다면 최경환은 지금 쯤 어느 신문사나 방송사에서 근무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대학시절 그의 꿈은 신문기자였기 때문이다.
    기자를 꿈꿨던 청년. 그의 순탄했던 삶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성균관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1981년, 그는 고향 광주에서 일어난 광주시민 학살 사건을 알게 된다. 이런 사실을 접한 그는 격하게 분노했다.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이때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1년 후였다.
    그 후 그는 투사로 변했다. 1981년 ‘광주학살 책임자 처단과 진상규명’ 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붙들려 감옥에 가야 했다. 세간에서는 이 사건을 ‘학림사건’이라고 부른다. ‘학림사건’은 이 전 장관 등이 ‘전민학련’과 ‘전민노련’을 결성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최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건으로, 경찰은 숲처럼 무성한 학생운동 조직을 일망타진했다는 뜻으로 이 사건에 '학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사건이 있은 후, 1986년 최경환은 ‘광주학살원흉처단국민대회’를 주동한 혐의로 또다시 감옥에 가야했다. 최경환은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1886년 민청련 활동 당시 종로2가 YMCA 앞에서 ‘광주학살원흉처단대회’ 시위를 주도하게 되었다. 나는 민청련에서 시위주동자로 자청해 나가게 되었다. 물론 감옥살이를 각오해야 했다. 이날 시위는 학생, 노동자, 청년단체들의 연합시위로 내 역할은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지하철 입구 뚜껑에 올라가 성명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대를 선동하는 일이었다. 나는 사전에 답사도 했다. 시간이 됐다. 지하철 뚜껑으로 달려가 한 팔과 한 다리를 올렸다. 그러나 몸이 올라가지 못했다. 나는 힘이 부족했다. 연습도 하지 않았다. 지하철 뚜껑에 매달려 있는 시간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나를 경찰들이 달려와 낚아채 거리에 내동이 쳤다. 나는 그 일로 준비하지 않고, 힘을 키우지 않고 몸을 던지는 것은 무모한 일이고 일을 망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나는 또 10개월의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이렇게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동안 그의 삶은 출세 코스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된다. 학교생활도 엉망이 되었다. 제적과 복학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남들은 4년 만에 졸업하는 대학을 14만에 졸업했다.


    청와대 생활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연


    당시 재야출신 노동운동가 방용석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국회에 발을 놓게 된 최경환은 1999년 청와대 공보수석실에 발탁되어 청와대 행정관, 공보기획보좌관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보좌하게 된다.

    “청와대 생활은 한마디로 새벽별보고 출근해 밤늦게 퇴근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긴장된 시간의 연속이었다. 청와대에 근무한 3년 여 동안 사적인 인간관계는 되도록 갖지 않았다. 이미 그때부터 청와대는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봉사하는 자리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청와대에서 ‘비가와도 걱정, 비가 안 와도 걱정’했다. 국민들이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고, 그때그때 대통령과 청와대, 정부가 어떻게 하면 국민들의 마음과 가까이 할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자신의 비전과 정책을 추진하는 자리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고 상처를 위로하는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나는 청와대 홈페이지를 담당하는 비서관이었다. 매일매일 대통령 메일이나 청와대 홈페이지, 주요 포털에 실린 네티즌들의 글을 모아 김 대통령에게 올려드렸다. 김 대통령은 인터넷 글을 읽기를 좋아했다. 더 많이 달라고 요청했다. 그 내용은 국정에 많이 참고가 됐다. 인터넷에 실린 글들을 보시고 담당 비서관이나 장관에게 그 내용이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도록 지시하는 일이 많았다.“


    김대중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


    최경환은 자신을 ‘김대중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이라고 강조한다. 그가 1999년 청와대 공보수석실에 발탁된 후부터, 2008년 8월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10년 동안 김대중 대통령의 곁을 지켰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굳이 증명하려 하지 않아도 그가 김대중 대통령 곁을 끝까지 지켰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또 자신을 ‘순장파’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청와대를 거친 이들이 정계로 나가 국회의원 배지를 달거나, 대학으로 가 교수가 되기도 하고, 공공기관이나 대기업에 취직을 하는 상황에서 자신은 김 대통령을 끝까지 모셨기 때문이란다.


    김대중 대통령의 리더쉽


    이런 그가 김대중 대통령의 8가지 리더쉽을 분석한 ‘김대중 리더쉽’이란 책을 펴냈다.
    다음은 책 내용 중의 한 구절이다.

    “민주주의는 싸우는 자, 지키는 자의 것이다. 싸우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고 하늘에서 감이 떨어지길 기다려선 안 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언젠가는 온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하면 빨리 오고, 외면하면 늦게 온다.”

    ‘DJ전도사’ 최경환. 어쩌면 그는 김 대통령의 말을 빌려 현 시국을 호되게 질타하고 있는지 모른다.


    민주화 운동에 헌신해 온 동지들


    “나는 80년대 전두환과 싸우면서 맺은 친구 선후배들을 좋아한다. 일부는 공부를 다시 시작해 의사, 변호사가 되어 있는 사람도 있고, 사업을 하거나 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낸 선후배도 있다. 또한 통일운동, 평화운동, 시민자치운동, 생태환경운동 등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힘들게 산다. 민주화 운동에 헌신해 역사를 바로잡았다는 자부심들은 크지만 생활은 여유롭지 못하다.
    최근 나는 이명박 정부 들어와 민주주의 가치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을 보면서 80년대 선후배들에게 말하곤 한다. ‘우리가 조로증에 걸린 것 아니냐. 다시 참여하고 나서야 되지 않겠느냐’고. 소시민적 삶을 사는 자신들을 자책하는 목소리도 많지만, 이들 70년대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 가장 건강한 세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개척했던 원풍모방, 동일방직 노동조합 출신들과 함께 ‘녹색환경운동’이라는 환경단체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이른바 70년대 후반 구로공단의 ‘공순이’들이었다. 당시 군사독재권력과 자본과 맞서 싸운 맹렬 여성들이었다. 이제 그들은 엄마가 돼 있다. 10여전 그들은 환경단체를 결성했다. 아이들과 함께 생태학습을 하고, 환경캠페인을 벌인다. 자신들이 젊은 시절 몸을 내던졌던 생각과 가치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 행복하다.“

    최경환은 당시의 소회를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새로운 아이콘


    최경환은 소통을 즐긴다고 했다. 트위터도 하고 페이스북도 하며 사람들과의 소통영역을 넓혀가고 있다고 했다. 디지털네트워크를 통한 소통은 이제 특별한 자랑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세상과 소통하려는 그의 의지를 높이 평가한다. 불통과 일방통행의 시대에 소통은 그만큼 중요한 화두이기 때문이다.

    • 관리자 news@jeo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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