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골 이야기



















  • “우리 서방님 배고파 죽을낀데...”
    “서방님 어디 갔는데요?”
    “녹산떡(댁)네 벼 베러 갔는데 예... 지금 열 많이 받고 있을 기라 예”
    “왜요? 무슨 일 있나요?”
    “지금 콤바인이 고장나서 고치고 있다고 하데 예. 지금 열 팍팍 받고 있을 기라 예”
    수연씨는 논에서 일하다 말고 고장 난 콤바인을 고치고 있을 남편이 걱정 됐는지 빨간 플라스틱 대야에 먹을 것을 주섬주섬 챙긴다.
    “윤 사장님 저 좀 밭에까지 태워다 주이소”
    “그렇게 하지요”

    오던 길로 다시 300m쯤 돌아가자 오른쪽 밭에서 기계를 고치고 있는 병갑씨의 모습이 보였다.
    콤바인의 핸들이 고장 났단다. 수연씨는 녹산떡 네 밭이 워낙 돌밭이라 콤바인 날이 고장난 줄 알고 있었는데 핸들고장이라니, 병갑씨가 뜻밖의 복병을 만난 것 같다. 그런데 구시렁대고 있을 줄 알았던 병갑씨가 너무 얌전하다.  이미 콤바인의 상태를 알고 있었던 듯. 병갑씨의 농산 연륜에 반비례해 낡아버린 콤바인 상태를 주인이 몰라주면 누가 알아줄까. 어려운 농촌 살림에 장만한 콤바인 덕에 이렇게 다섯 식구 잘 잘고 있는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데 병갑씨도 점심은 먹고 일을 해야할 것 같다.
    병갑씨는 밥을 가득채운 커다란 밥공기를 들고 자신의 밭에서 수확한 야채를 반찬삼아 참 맛있게도 먹는다.

    내가 오늘 백자골에 행차한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다.
    어제 병갑씨의 아이들로 부터 백자골 가까운 곳에 토실토실 익은 알밤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나는 자연산 밤과 밤나무 사진이 필요했다. 산과 들에서 나는 곡식이며 과일 사진을 모두 찍었는데 밤 사진은 아직 찍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이 기회다’라는 생각으로  백자골을 방문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올 시간이 멀었단다. 오늘은 오후 5시가 넘어야 아이들에 집에 올 수 있단다. 그 때쯤이면 해가 기울어 촬영이 불가능하다.  아이들이 있으면 그 모습을 담으면 더 예쁜고 감동적인 사진이 나올텐데.... 하지만 어쩌라. 아이들 대신 조금 한가한 수연씨가 동행해 주기로 했다.

    다시 마을로 돌아오자 병갑씨 집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임동떡(댁)이 벼들 담고 있다. 수연씨는 다짜고짜 임동떡에게 가더니 “아짐 우리 밤따러 갑시다” 하고 채근한다. 임동떡은 별 거부 반응 없이 수연씨를 따라나섰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두 집안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밀약이 있단다. 그런데 대외비라니 더 이상 관심 갖지 않기로 했다.

    임동떡은 나와 구면이다. 며칠 전 모 방송사에서 미처 촬영하지 못한 촬영 분을 내가 대신 찍는다고 호들갑 떨 때 적토미 씻는거며 밥 짓는거, 맛있게 밥상 차리는 것은 몸소 시연했던 분이다.

    “가만 있어봐요, 밤 따려면 긴 막대라도 가져가게...” 수연씨가 긴 막대를 찾으러 집을 뒤졌다. 그러다 마침내 찾은 것이 긴 알루미늄 막대다. 세게 한번 내리치면 막대가 금방 휘어버릴 것 같다. 그러나 어쩌랴. 이런 막대밖에 없으니.

    아까부터 주인마님의 움직임을 따라 깽깽거리며 하소연하던 깜순이가 애절한 눈빛으로 수연씨를 바라본다. 깜순이는 새끼를 배고 있어서 안전하게 수연 씨가 묶어놨단다. 깜순이의 말없는 하소연이 안타까웠던지 수연씨가 깜순이의 목줄을 풀어주었다. 깜순이는 무거운 몸을 힘에 부쳐하면서도 마냥 즐거워한다.

    수연씨가 긴 막대를 들고 앞장서고 임동떡과 내가 뒤를 따랐다. 똘이와 깜순이는 우리 일행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했다. 100여 미터를 걸어 산 아래 도착하자 입구에서 똘이와 깜순이가 반긴다. 이 녀석들은 몇 번 와본 모양이다.
    “이 녀석들은 길을 아네요”
    “똘이는 10살 먹은 노구라 예”
    “10살이요? 그러면 깜순이는..?”
    “깜순이는 1살이요”
    “그러면 깜순이 새끼의 애비는 누구인가요?”
    “똘아라 예”
    “예?”

    “에고,  할아버지와 손녀의 로맨스였다. 똘이 할배 땡잡았네. 뭔 복이여.”

    나지막한 산 입구로 들어서자 몇 기의 묘지들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열심히 묘지를 가꾸더니만 올해는 자손들이 코빼기도 비치지 않데 예. 너무 보기 싫어서 쌍둥이 아배가 벌초를 대신 해줬어요.” 수연씨의 설명이다. ‘아마 경제가 어려워 후손들이 고향 나들이가 못했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숲으로 조금 더 걸어 들어가자  이랑을 곱게 골라 놓은 밭이 보인다. 부드러운 가을 햇살을 숲을 타고 밭에만 쏱아지고 있다. 수연씨와 임동떡은 익숙한 걸음으로 밭두둑을 성큼성큼 걸어 밤나무가 있는 곳으로 갔다. 똘이와 깜순이는 나이차가 나서 그런가 별로 다정한 부부 같지는 않다. 각자 다른 곳에서 노는 것을 보면. 개들도 세대 차인가 있나?  궁금하긴 하다.

    밤나무 아래는 밤 껍질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병갑씨 아이들이  밤 따기를 몇 번 했으니 밤 껍질이 어지럽게 널려 있을 수 밖에. 나와 수연씨가 떨어진 밤을 찾아 헤메는 동안 임동떡은 어디서 주웠는지 토실토실 한 알밤 세 개가 들어있는 밤을 주어 내 앞에 던져 놓는다.
    피사체가 되기에 참 좋은 밤송이다.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셔터를 눌러댔다. 그동안 임동떡이나 수연씨 모두 밤 줍는데 익숙해진 것 같다. 그래도 임동떡 만큼 밤을 잘 줍는 사람은 없었다. 이것도 다 연륜인가 보다.

    밤을 따고 있는 수연씨 어깨 너머로 비치는 부드러운 가을 햇살이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낸다. ‘밀레의 만종“은  못되더라도 ’백자골 밤따는 아낙‘은 되지 않을까.

    떨어진 밤을 줍는 것만으로 성이 차지 않았나보다. 임동떡이 알루미늄 막대를 들고 밤을 치기 시작한다.  ‘후둑두’ 소리를 내면 한 무더기의 밤이 쏟아진다. 그러자 임동떡은 막대를 내려놓고 껍질이 다 벗겨지지 않은 밤송이를 고무신 사이에 넣고 익숙한 솜씨로 밤을 깐다. 한쪽발로 밤을 잡고 다른 한발로 밤을 까는 것 같다. 그러더니 작은 나무 막대를 도구로 사용해 밤을 깐다. 거침이 없다. 하루아침에 다져진 솜씨는 아니겠지만 혀를 내두를만한 솜씨다.

    두 사람이 열심히 딴 밤을 밤나무 아래 내려놓았다.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 욕심대로 따려면 한참 더 따야할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다. 병갑씨네 다섯 식구가 먹기에 그리 부족한 양 같지는 않다. 내일 필요하다면 내일 다시 이자리에 오면 되니까.

    부드러운 10월의 햇살이 저 산을 넘어가기 전에 우린 내려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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