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3) 中庸思想(중용사상)의 유래(由來)
中庸이란 사상은 중국의 유교에서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철학 인도의 불교 등 온 인류의 철학사상의 중요한 根源地(근원지)에서 제기된 문제인 것이다.
서양의 고전으로서는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키아 에디카”라는 윤리 書에서 중용사상이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 윤리 서에 의하면 인간이 하는 모든 일에는 알맞은 정도라는 것이 있어서 부족이나 초과로 인하여 오히려 그 본성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운동이 체력을 증진하는데 좋은 방법이긴 하여도 부족하여도 지나쳐도 다 같이 체력을 상실하고 음식물을 너무 적게 섭취하거나 너무 많이 섭취하여도 건강을 해치지만 알맞게 섭취하면 건강을 증진하여 유지할 수 있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연속적이면서도 분할 가능한 것에 있어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 너무 작은 것 그리고 알맞은 것을 분간하여 취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過不足이 없는 中을 사물 자체의 中央으로서의 中과 엄격하게 구별했다.
이것은 算術的(산술적)인 比例(비례)에 있어서의 中이 아니요, 이 中은 만인에 공통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過不足이 없다는 의미의 中은 가령 식사를 하는데 각 개인의 신체조건에 따라 그에 알맞은 양을 취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서양의 중용사상도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플라톤에 있어서만 해도 이미 쾌락과 고통의 혼합에 유의하여 즐기면서도 우는 비극의 관람자들의 心理에까지 언급했으며 度(도)를 지나치지 말라는 교훈 속에 조화를 이룬 善을 보이고 있다 .
더 나아가 나와 관계에 있어서의 중용이라는 것은 소크라데스가 그의 표어로 했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한 델포이 신전의 교훈과 통하는 것이다. 오늘의 서양에 있어서 중용사상은 무엇보다 중요시되고 있음을 본다.
역사학자 토인비가 중용을 황금의 중용이라고 하여 善의 극치임을 말하면서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 표현했다. 다시 말하여 時中이라야 비로서 옳은 응답을 하는 것이다.
중용사상은 중국에 있어서도 공자 이전에 전통이 있어온 것은 거의 확실하다.
논어 堯曰(요왈) 篇(편)에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고 한 말이 있다(允執其中) 이것은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제위를 물려주면서 治理(치리)의 방법으로 준 敎訓이다.
中의 이치는 지극하다 陰만으로도 生成되지 않고 陽만으로도 生成되지 않는다. 치우치면 금수가 되고 中이면 사람이 된다. 中인즉 치우치지 않음이요, 庸인즉 바뀌지 않음이다. 中만으로 그 뜻을 다하기에 부족하므로 中庸이라 하였다.
소그라테스(BC 470-399) 그리스의 철학자 아테내 출생
국가공인의 신을 인정하지 않고 청년들을 부패 타락시켰다는 죄명으로 70세에 처형당하였다. “너자신을 알라” 명제로 眞理의 客觀性(객관성)을 밝히고 知 德 合一의 倫理思想(윤리사상)을 가르쳤다.
프라톤(BC 427~347): 그리스의 철학자 아테내출생 소그라테스의 제자
관념적 이상론의 서양 철학의 비조
저서 [쏘크라테스의 변명] [파이돈 향연] [국가론 공화국]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 : 그리스의 철학자 프라톤의 제자. 폐리파프스 학파의 선구자. 形相因(형상인) 動力因(동력인) 目的因(목적인)의 진로를 상정하고 動的인 가능성이 現實成(현실성)이 되는 과정으로 생각하여 모든 것에 적용했다.
토인비(1889~1924) : 영국의 역사학자
문명형성의 일반법칙을 체계화하여 (그리스의 역사사상 역사의 연구)등의 저서를 냈고 현대 세계의 救濟(구제)를 시도하는 새로운 세계사의 수립을 시도하였다.
저서 [시련대에 선 문명] [국제문제 개관]등이 있다.
性理學者 靑松 崔 榮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