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 최영진 강좌
  • 孔子의 政治思想 2

  • 작성일 2016-01-18 11:16:57 | 수정일 2016-01-18 19:49:41
  • 마침내 司寇(사구)가 되시고 大司寇(대사구)가 되어 그 다음해인 정공10년 정공을 도와 협곡에서 제나라와 회합하여 제나라가 침범한 땅을 돌려받았다.

    정공 12년 子路로 하여금 계씨의 家臣을 삼고 세 도읍의 城을 허물고 갑옷과 병장기를 거두게 하자 맹씨의 집안에서 성을 허물지 않음으로 포위하고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정공 14년은 공자나이 56세라 정승의 일을 攝行(섭행) 하시여 無道한 小正妙(소정묘)를 제거하고 국정을 운영하시니 3 개월 만에 크게 다스려졌다.

    이에 이웃나라인 제나라가 공자를 두려워하여 공자를 내쫓고자 계환자에게 美女와 樂工을 보내어 노나라를 어지럽게 하고자 하니, 공자님은 이를 저지하였으나 계환자가 받아들이고 음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조회를 참석하지 않으며 郊祭(교제)를 지내고 大夫에게 燔肉(번육)을 보내지 않자 노나라에 道가 통하지 않을 것을 아시고, 제자들을 데리고 노나라를 떠나 천하를 周流하게 되시였다. 이때에 따르는 제자가 25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실로 政事에 임문하지 5 년 만에 최고의 국정 담당자가 되어 공자님이 꿈꾸어 오던 衣食住 生活이 풍족한 나라 국방이 튼튼하고 서로 믿고 의지하는 나라 젊은이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孝悌忠恕가 충만한 德治國家인 福祉國家를 세울 절호의 기회를 공자를 시기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잃고 마신 것이다.   

    공자나이 63세에 진나라에 머물고 계시었는데 조간자의 家臣인 필힐이 中牟땅으로 배반하고 공자님을 불려 정사를 맡기려하자 공자님은 가시고자 하였으나끝내 결행하지 못한 것은 그의 무도함을 引導하지 못할까 해서이다.

    자로가 공자님께 말하기를 “내가 옛날에 선생님께 들으니, 몸소 그 몸에 착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자 에게는 들어가지 않는다 하셨는데, 필힐이 中牟(중모)땅으로 배반하고, 선생님을 부르신데 가려고 하신 까닭이 어째서 입니까?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단단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갈아도 옅어지지 않으니, 희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으니, 내가 어찌 뒤옹박 같아서 한 곳에 매달려 먹기를 구하겠는가?” 하고 말씀하셨다.

    그 다음해 위나라 영공이 불려 정사를 맡기려고 공자님께 陣法을 묻자, “내가 제사 지내는 일에는 익숙하나 군대를 부리는 일은 모르신다.” 고하시고 위나라를 떠나 다시 진나라로 가셨다.

    공자 년 65세에 초나라 召王(소왕)이 서사의 땅을 주어 공자를 대부로 봉하고 정사를 맡기려 하니 승상인 令尹子序(영륜자서)가 극구 반대하니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다시 위나라로 돌아오시니 靈公(령공)은 이미 죽고, 그의 손자 輒(첩)이 위나라 군주가 되어 공자님께 정사를 맡기려 하셨다.   

    자로가 말하기를 “위나라 군주가 선생님을 기다려 정사를 함께 펴려고 하시니, 선생님은 장차 무었을 먼저 하려 하십니까?” 하고 묻자,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명분을 바로 세우겠다.” 말씀하시니, 또 자로가 말하기를 “어떻게 명분을 바로 세우려 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그 말이 순하지 못하고, 말이 순하지 못하면 , 일이 이루어지지 않느다.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禮樂이 일어나지 못하고,예악이 일어나지 않으면, 刑罰이 알맛지 않고, 刑政(형정)이 바르지 못하면, 백성이 手足을 둘 때가 없다.” 하시며 “군자가 명분을 얻으면 반드시 말할 수 있고 반드시 행할 수 있는 것이니, 군자는 그 말에 대하여 구차함이 없을 뿐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 당시 노나라에서는 공자의 제자 염유가 季康子(계강자)의 장수가 되어 제나라와 싸워 공을 세웠는데 공자님에게 위나라에서 정사를 맡기려 하는 기미를 아시고 공자님을 부르므로, 자로로 하여금 위나라에 남아 정사를 돌보게 하시고 노나라에 돌아오시니, 애공 11년 공자나이 68세가 되었다. 실로 노나라를 떠난지 햇수로 12년이 되었다.

    계강자가 공자님을 찾아와 정사를 물으니 , 정치란 바르지 않는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니, “그대가 바름으로 정사를 한다면 누가 감히 바르지 못한 짓을 하겠습니까?” 하고 대답하니, 또 묻기를 도둑을 걱정하시자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탐욕을 부리지 않는 다면 비록 백성들에게 상을 준다고 하여도 백성들은 도둑질 하지 않을 것입니다”하셨다. 그러나 계강자는 공자님을 등용하지 못했고 공자님 또한 벼슬을 구하지 않으셨다.

    또 애공이 불려 정사를 묻기를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하니 공자님이 말씀 하시기를 “곧은 자를 들어 쓰고 굽은 자를 버리면 백성은 복종하고 굽은 자를 들어 쓰고 곧은 자를 버리면 백성은 복종하지 않습니다.” 하시니 “또 묻기를 제자 중에 누가 학문을 좋아 합니까?”하니 “顔回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화를 옮기지 않고 두 번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불행하게도 명이 짭아 죽었습니다.”

    물려나와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악경을 刪整(산정) 하시고 제자를 가르쳤는데, 따르는 제자가 3,000명이요, 몸소 육례를 통달한자가 72명이나 되었다.

     

    하루는 자공이 問政한데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食足 兵足이면 民信矣니라” 하시였다. 다시 말한다면 의식주생활이 풍족하고, 국방이 튼튼하면 백성이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게 돨 것이란 말이다. 자공이 또 묻기를 “이 세 가지중에 한 가지를 버린다면 무엇을 먼저 벼려야 합니까?”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去兵이니라” 하시면서, 양식이 풍족하고 백성들의 믿음이 깊으면 兵이 없어도 지킴이 견고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자공이 또 묻기를 “부득이 해서 버린다면 이 두 가지 중에 무엇을 먼저 벼러야 합니까?” 공자님이 말씀하셨다.

    “去食(거식)이니라 양식을 벼려야하니, 예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주검이 있거니와 사람은 믿음이 없으면(無信不立) 서지못한다.” 하시엇다.  

    공자님이 몸이 쇠약하여 지자 죽엄이 가차이 온줄 알고 한탄 하시기를 나는 꿈속에서도 다시는 周公을 뵈올 수 없겠구나 하시면서, 평소에 늘 생각하여온 복지국가 건설을 하지 못하고 명이 다하게 됨을 안타까워 하시었다.

    질병이 깊어지자 위나라에 가있는 자로가 문병을 와서 “問事鬼神(문사귀신)한데”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未能事人(미능사인) 焉能事鬼(언능사귀)리요” “敢問死(감문사) 하니 未知生(미지생) 焉知死(언지사)라” 하시었다.

     

    병이 더욱 깊어지자 자로가 다시 문병을 와서 “하늘에 기도드려 병을 고치고자하니,” 공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런 일도 있다더냐? 물으니, 자로가 말하기를 하늘과 땅 귀신에게 빈다 하었습니다.”하니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오래전부터 기도하여왔다. 나의 생활이 바로 기도다.” 하시며 “사람은 죽으면 반드시 후손을 남기고 흙으로 돌아간다.”하시였다.

    그 다음해에 자로가 위나라에서 公懷(공회)의 난에 죽엇으며,애공16년 기원전479년 4월11일 공자님이 별세하시니 나이가 73세 이다.

    魯나라 성도의 사수가에 장례를 치르고, 제자들이 모두 心喪(심상) 3년 喪을 입고 떠났으나 오직 자공만이 묘 옆에 움막을 짓고 6년을 모시었다.   

    공자님께서는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남과 더불어 살면서 서로 돕고 의지하며 지극한 선에 머물러, 하늘에 이치를 거스리지 않고 어떻게 살아 갈것인가를 말씀과 행동으로 보이신 위대한 敎育者시며, 政治家이시며, 進步主義的 思想家이셨다.

     

    청송 haenam7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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