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인간 절도 피의자의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도 잊은 사회

  • 절도를 하기위해 가정집에 침입했다가, 집주인으로부터 폭행을 당해 뇌사상태에서 치료를 받다 끝내 사망한 어느 절도피의자에 대해, 극소수의 누리꾼을 제외한 대부분의 누리꾼들은 일말의 동정심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절도피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집주인의 처벌에 대해 법원을 성토하는 분위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대단히 우려스러운 사회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댓들 내용을 살펴보면 절도범에 대한 복수의 정당성, 아직 발생하지 사실에 대한 공포심, 상대의 불법행위에 대한 사적구제, 상대에 대한 만족할만한 복수가 주장의 주를 이루고 있다. 미국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당방위’의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주장들이다. 좀 더 나가면 원시시대의 법 원리인 동해보복 원리의 부활이라고 할만하다.

    물론, 법조계 일각에서는 우리나라 법에서 인정하는 정당방위가 너무 협소해 그 범위를 좀 더 넓혀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당방위의 범위를 더 넓힌다 해도 절도범을 폭행으로 숨지게 하는 사건까지 정당방위로 인정할지는 미지수다.

    사실, 법이 존재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사적구제를 못 하게 막아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데 있다. 자력구제를 인정한다면 법이 존재할 이유도 없고, 세상은 폭력이 난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누가 피해를 입더라도 그 구제는 법을 통해서 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법적 구제나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피해자에게는 불만족스러울 수 있다. 그런 현상들이 여러 사건에서 실증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법을 따라야 하는 것은 더 큰 폭력을 예방하기 위서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 온다는 사실을 뉴스를 통해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다. 정당방위가 넓게 인정되는 미국의 경우를 보자. 얼마 전 백인 경찰이 흑인을 총으로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뒤를 이어 흑인이 백인 경찰을 살해하는 일이 발생했다. 경찰의 직무는 국가가 인정한 것이지만 흑인들은 이를 부당한 폭력으로 판단했고 그에 대해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복수를 한 것이다.

    ‘평등의 구현에 총기만한 것이 없다“는 미드의 대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총기 사용이 금지된 우리나라에서 ‘정당방위’를 넓게 인정한다 해도 그 이익의 수혜자는 별로 많지 않다. 주먹이 강한 자에게 더 많은 정당성을 부여해 줄 뿐 사회적 약자는 여전히 약자로 남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절도범의 사망 사건에서 누리꾼들의 걷잡을 수 없는 증오심을 목도했다. 그 것은 뜨거운 정의감의 발로라기보다는 누리꾼들이 상상하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끔찍한 사건의 상상 속에 표출된 적개심과 증오심이었다. 물론 절도범이 미수에 그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아무도 예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흉기를 들었다는 기사가 없는 것을 보면 강도범으로 변할 개연성은 낮아 보인다. 그런데도 절도범을 사망에 이르게한 중대한 폭행이 정당하다는 주장은 폭력성과 잔인성에 물든 우리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대단히 우려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 윤승현 news@jeo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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