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낀 두륜산

  • 두륜봉

    <만일재에서 바라 본 두륜봉>


    두륜산은 산림청 선정 ‘우리나라 100대 산’ 중의 하나이다. 전라남도 해남군에 위치하고 있으며 1979년 전남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총 면적은 34.64㎢이다. 두륜산은 주봉인 가련봉(703m)을 비롯하여 능허대(노승봉. 685m), 두륜봉(673m), 고계봉(638m), 도솔봉(672m), 혈망봉(379m), 향로봉(469m), 연화봉(병목안봉. 613m) 등 크고 작은 8개의 봉우리가 대흥사를 향해 원형을 이루고 있다.
     
    생태환경으로는 난대성 상록활엽수와 온대성 낙엽 활엽수들이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다. 또 성인의 키에 버금가는 억새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두륜산 시설지구에서 피안교에 이르는 2km 구간에는 수백 년 된 수목들이 즐비하고 이곳의 대표적인 식생이라 할 수 있는 동백나무숲과 왕벚나무 자생지가 있다.


    사찰로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가 있다. 산내 암자로는  남미륵암, 북미륵암, 일지암, 진불암, 상원암, 남암, 관음암, 청신암, 백화암, 만일암 등이 있다.


    대흥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년) 아도화상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절은 북원(北院)과 남원(南院) 구역으로 구분되는데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청운당, 대향각 등의 전각과 요사채 등이,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가허루, 봉향각, 동국선원, 그리고 종무소 등이 배치되어 있다.


    산내 문화재로는 국보 제308호인 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北彌勒庵磨崖如來坐像)이 있고 보물 제 제88호 탑산사동종(塔山寺銅鍾), 보물 제301호 북미륵암삼층석탑(大興寺北彌勒庵三層石塔), 보물 제 제320호 응진전 앞 삼층석탑(大興寺 應眞殿前 三層石塔), 보물 제1347호 서산대사부도(大興寺西山大師浮屠), 보물 제1357호 서산대사유물(大興寺西山大師遺物), 보물 제1547호 금동관음보살좌상(大興寺 金銅觀音菩薩坐像), 보물 제1552호 영산회괘불탱(靈山會掛佛幀)가 있다.


    산내 암자 중 일지암은 다성이라 불리는 초의 선사가 그의 '다선일여(茶禪一如)'사상을 생활화하기 위해 꾸민 다원(茶苑)으로 현재 백련사 주지는 있는 여연 스님이 얼마 전까지 머물며 다도를 설파하던 곳이다.


    두륜산 등산의 장점은 시간과 체력에 따라 코스를 단축하거나 늘릴 수 있다는 점이다.


    제1코스는 대흥사 매표소에서 출발하여 장춘동 → 대흥사 → 표충사 → 북미륵암 → 오심재 →  노승봉 → 가련봉 → 만일재 → 두륜봉 → 진불암 → 표충사 → 대흥사 구간으로 5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제2코스는 대흥사 매표소에서 출발하여 장춘동 → 대흥사 → 표충사 → 북미륵암 → 만일암터 → 만일재 → 진불암 → 표충사 → 대흥사 구간으로 산행에 3시간 40분 정도 소요된다.


    지역 주민들은 간단하게 두륜산 산행을 즐길 수 있는 코스를 선호하는데 ▲오소재 약수터에서 출발하여 오심재 → 북암을 거쳐 다시 오소재 약수터로 하산하거나 ▲오소재 약수터에서 출발하여 오심재 → 노승봉 → 가련봉 → 북미륵암 → 오심재 → 오소재로 하산하는 코스가 그것이다.


    오소재 약수터에서 만일재까지의 산행
    햇빛은 반짝. 두륜산을 향해 출발하기 전 해남읍의 날씨가 그랬다. 두륜산 산행에서 쾌청한 날씨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가 온다거나 안개가 뿌옇게 낀 그런 날을 예상한 것도 아니었다. 나의 예상은 그런대로 맞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두륜산 산기슭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소재 약수터에 도착할 무렵 하늘은 회색빛을 띄기 시작하더니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 부을 것 같다.


    갈등의 순간. 이쯤에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인지 산행을 계속해야 하는 것인지 망설이고 있는데 산기슭에서 나보다 먼저 산을 오르는 일가족이 보인다. 연세가 지긋한 것이 우리 부모님과 동년배는 될 것 같다. ‘어르신도 오르시는데 내가 되돌아간다면 그것도 창피한 일’ 그냥 뒤따라 오르기로 했다.


    소나무와 잡목들이 우거진 숲을 따라 형성된 좁은 길은 따라 걸었다. 얼마 전 내린 비로 바닥이 질척질척 했다. 세탁한지 얼마 되지 않은  운동화에 흙탕물이 튀어 얼룩덜룩 해졌다. 날씨가 흐려서인지 숲은 어둡기 까지 했다.


    숲길을 반쯤 올랐을까 쓰레기 봉지를 든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내려왔다. 궁금해서 물어보니 해남의 모 산악회에서 두륜산을 청소하는 날이란다.


    2~30분을 걸었을까? 환한 하늘과 넓은 공터가 보인다. 이곳이 오심재다. 평소대로라면 성인의 키와 견줄만한 크기의 억새들이 자라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평지의 잔디밭 같다. 걷거나 앉는데 풀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심재에서 본 고계봉>
     

    오심재에서 잠시 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북쪽에는 수채화로 채색한 듯한 파란 하늘과 하얀 물감을 흩뿌려 놓은 듯한 구름이 고계봉 정상에 걸쳐있고 남쪽에는 내가 올라야 할 노승봉이 진시황의 무덤처럼 떡 버티고 서있다. 작은 소나무 그늘에는 산행 온 부부가 마주 앉아 간식을 즐기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오심재에서 헬기장 오르는 길은 등산객 한 사람이 걸을 수 있는 소로이다. 초입은 억새와 잡목들이 무성한 구간으로 산을 오르면서 구계봉 방향을 조망할 수 있다. 잡목구간을 지나면 돌과 나무로 이루어진 지대가 기다린다. 여기서 부터 헬기장까지는 숲 밖의 세상을 볼 수 없다.


    헬기장을 지나자 길 우측에 노승봉을 이루고 있는 암반이 눈에 들어온다. 황토색의 암반은 온통 물로 얼룩져 있고 일부분에서는 물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그 물을 의지해 생명을 유지하는 것인지 암반 하부에는 이름 모를 수목들이 자라고 있었다.


    암반을 지나자 숲 바깥세상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통천문 아래서 쉬고 있는 등산객>

    산행에서 만난 여성이 통천문 아래 작은 바위에 올라 주작산 쪽을 응시하고 있다. 그 모습이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정로도 멋스러워 보인다. 그가 내려오자 나도 그 자리에 섰다. 산기슭을 내려다보았다. 순간, 탄성이 절로 나온다. 짙은 안개가 산등성이에 내려 앉아, 내가 서있는 곳에서 부터 안개로 단절된 산등성까지의 모습만 보여주는데 무릉도원이 따로 없을 것 같다.

    두륜산 통천문

    <통천문 오르는 길>

    지금까지는 두발로만 걸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두 손까지 보태야 할 때 인 것  같다. 높이가 10m쯤 되어 보이는 통천문(개구멍)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림짐작으로는 별로 높을 것 같지 않은데 오르기 조금 겁난다. 두 여성 등산객들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로프를 잡고 통천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도 밧줄을 잡고 통천문을 올랐다.


    노승봉에 오르자 주위는 온통 안개다. 좁고 약간 경사진 암반에 서서 주위를 둘러본다. 가시거리 10m 정도이다. 안개로 사라진 그 너머의 풍경은 상상 속에서나 그려야 할 것 같다. ‘이것이 무슨 시추에이션? 이것은 정말 카메라를 두 번 죽이는 일이야’라고 말하고 싶지만 어쩌랴. 이것도 하늘의 뜻인걸.


    그들이 떠나자 노승봉이 휑하니 빈 것 같다. 안개는 바람을 따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안개가 곧 내 몸에 스멀스멀 기어오를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내 모습 밖에 볼 수 없겠지?’ 그런데 안개와 나와의 거리는 끝내 더 좁혀지지도 더 넓혀지지도 않았다.

    <부안에서 온 등산객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노승봉 아래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노승봉 위로 하나 둘 등산객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심재에서 헬기장을 오르는 구간에서 만난 등산객들이었다. 서로 부르는 호칭을 들어보니 교회와 관련된 직책이다. 아마 교회 신도끼리 산행을 온 것이리라.

    가련봉

    <안개 낀 가련봉>

    노승봉을 내려가는 길 입구에 서자, 짙은 안개주머니에 갇힌 가련봉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두꺼운 허리는 안개가 어쩌지 못했는데 머리와 얼굴은 안개에게 보쌈을 당한 것 같다. 어쩌다 억센 바람이 안개를 밀어내면 푸르른 나무와 암반이 동거동락 하는 원래의 모습을 잠깐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다시 안개의 포로가 된다. 이 장면을 목격한 등산객은 연극의 커튼콜을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연극의 커튼콜이 되려면 가련봉의 진면목과 안개로 분실한 모습을 교차로 보여주어야 하는데 지속적으로 분장한 얼굴만 보여줄 뿐 좀처럼 진면목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가련봉 정상

    <가련봉 표지석>

    역시 가련봉은 안개에게 붙잡힌 봉우리였다. 가련봉에 올라서자 표지석이 있는 암반 외에는 주변 경관이 보이지 않는다. 등산객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공포감만 없을 뿐 영락없는 영화 ‘미스티’의 한 장면이다.


    가련봉을 내려가는 철과 나무로 된 계단이다. 계단의 형태와 배치가 산의 모습과 참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등산객을 배려한 계단 덕분에 쉽게 가련봉을 내려갈 수 있었다.

    두륜산 새바위

    <새바위>

    가련봉 계단을 다 내려서자 길 왼쪽에 길게 누워있는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그 위에 가볍게 앉아 있는 작은 바위가 있다. 새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새바위’라고 부른다. 새바위가 앉아있는 새둥지바위(?)에 올라 잠시 휴식을 취했다.

    두륜산 너덜지대

    <굵은 바위로 형성된 너덜지대>

    눈앞에 펼쳐진 이 너덜너덜한 돌들이 이곳이 너널지대임을 말해주고 있다. 너덜지대란 풍화작용으로 파괴되어 생긴 바위 부스러기가 있는 곳으로 ‘돌 부스러기 지대’라고 도 한다.


    울퉁불퉁한 돌 위에서 넘어지면 최소한 중상을 입을 것 같다. 나와 가족의 안녕을 위해 돌에 시선 집중, 돌 위에 착지 집중. 너덜너덜한 돌들이 사람 참 너덜너덜하게 한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바로 만일재>

    너덜지대를 지나 얼마를 더 걸었을까. 굽은 길을 따라 내려가자 두륜봉과 만일재가 시야에 조금씩 들어온다.


    만일재는 헬기장처럼 평평한 지대다. 동쪽으로는 해남북일면과 강진 사내호를 조망할 수 있고 서쪽으로는 나무숲 길을 따라 만일암터, 천년수, 북미륵암, 대웅전, 오심재로 갈 수 있다. 남쪽으로는 두륜봉을 오를 수 있고 북쪽은 가련봉, 노승봉, 오심재로 가는 코스이다. 이곳은 등산객들이 갈 방향을 선택하게 하는 갈림길이다.


    가련봉에서 만일재까지 오는 도중에 등산객을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만일재에 들어서자 등산객이 넘쳐난다. 사람 수 만큼이나 그들의 행동은 다양한데, 홀로 앉아있는 사람, 단독으로 가련봉 코스를 향해 가는 사람, 삼삼오오 짝을 지어 두륜봉을 향해 가는 사람. 그들은 그렇게 나뉘어졌다.

    두륜봉

    <두륜봉>

    만일재에서 바라본 두륜봉의 머리에도 어김없이 안개 접시가 씌어져 있다. 두륜산의 안개는 산봉우리의 영혼도 만들어내나 보다.


    만일재에서 두륜봉을 오르지 않고 만일암터를 향해 하산을 시작했다.

    만일암삼층석탑

    <만일암터>

    주인 없는 만일암터는 풀만 무성하다. 발목까지 차오른 풀을 내려다보며 만일암삼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만일암터 한편에서 단체 등산객들이 점심을 먹고 있다. 이들 마저 이곳을 찾지 않았다면 만일암터는 적막함만 감돌았을 것이다.

    천년수

    <천년수>

    천동과 천녀의 전설을 간직한 천년수(千年樹)다. 하늘을 찌르려다 힘에 부쳤는지 더 오르지 못하고 얼기설기 얽힌 가지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어 그 높이를 대충 가늠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수령은 1200~1500년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도외시하더라도 두꺼운 허리둘레와 잘리고 부러진 가지가 천년수의 나이를 짐작하게 한다. 또한 그동안 겪었을 기나 긴 세월의 풍상을 몸으로 말해주고 있다. 수년 전 방문했을 때보다 주변 수목의 침범이 확대되었다. 그런데 천년수의 휴식을 방해하는 등산객의 발길이 천년수의 영토를 지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다행이고 또 한편으로는 아이러니다.
     

    <사진ㆍ 글 : 윤승현>
    • 관리자 news@jeo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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